
What happened?
Klaus V Reinherz / Reader
Written by @Yang__nim
그날은 아침부터 바빴다. 출근하자마자 스티븐이 와서 일거리를 쌓더니 조금 후에는 아닐라가 자료들을 넘겨줬다. 출근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내 책상 위에는 고문서와 보고서로 이루어진 산등성이 하나 생겨났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비슷비슷한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사무실에 복귀했던 사토와 브리게이트는 책상마다 서류 산을 한 아름씩 얹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고 뒷걸음질을 치다 스티븐에게 덜미를 잡혔다.
"맞는 자료가 하나도 없어. 이걸 찾으려면 일일이 검토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능하기만 하다면 재프의 도움이라도 받고 싶을 정도야."
스티븐이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재프라면 도움은커녕 겨우 정리한 자료도 엉망으로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를 두렵게 만들었다. 결국 두 사람도 조용히 고문서에 머리를 박았다.
최근, 도시 곳곳에서 잠입임무를 수행 중인 정보원들로부터 공통된 내용의 보고서가 올라왔다. 어떻게 포착할 수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불특정한 시간 이동. 현재까지는 딱히 이렇다할 사고로 번진 시간 이동은 없었던 모양이지만 타임 트러블로 번지기까지는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야심을 가진 누군가가 과거로 가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미래를 바꾸기라고 한다면 큰일이다. 안건은 순식간에 라이브라가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되었다. 다만 시간 이동에 대한 자료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라이브라의 주술사와 마도 공학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는 동안 그 외 멤버는 자료를 뒤적이며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찾기 위해 애썼다.
허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한껏 몸을 구부린 채 고문서와 보고서의 내용을 대조해보던 중이었다.
"그 정도만 하고 가서 점심이라도 먹고 오지."
고개를 들면 스티븐이 웃으며 문을 가리켰다.
"다들 나갔어. 나도 지금 나가려고. 자네는?"
"저는 지금 하는 부분만 마무리 지으려고요."
"그래? 그럼 나올 때 크라우스도 챙겨주겠어? 온실로 들어간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여태 나오지를 않아."
"네, 알겠습니다."
온실. 라이브라에는 두 가지 불문율이 있다. 게임, 혹은 원예에 집중 중인 크라우스는 건드리지 말 것. 스티븐의 설명에 따르면 어차피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옆에서 뭔 짓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모양이지만 K.K나 길베르트를 보면 다른 말 못 할 이유가 있는 듯했다. 상사가 숨기려는 걸 캐는 데에 취미가 없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말지만 말이다.
고문서와 보고서 대조 작업을 마친 후 시계를 봤을 때는 12시 20분이 막 지난 참이었다. 멤버들은 모두 점심을 챙기러 나간 후라 빈 사무실 안에는 나만 혼자였다.
'아니, 혼자는 아니지.'
나가기 전에 스티븐이 말했던 온실로 시선이 향했다. 온실 안에서부터 불투명한 유리문 틈으로 비쳐 들어오는 조명이 무지갯빛으로 바닥을 물들였다. 그 위를 밟고서 문을 두들겼다.
"라인헤르츠 씨."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다. 자리를 비웠나 싶기에는 분명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혹여 원예에 집중하느라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노크하며 문가에 귀를 댔다. 솨아아-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온실에서 바람이라니? 어쩐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라인헤르츠 씨, 무사하십니까?"
문을 열어젖히는 그 순간이었다. 공간이 재편성되더니 눈 깜빡할 사이 나는 드넓은 초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곳은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들판 한 가운데였다. 길게 자란 수풀이 허벅지까지 올라와 옷자락을 스쳤다. 간간이 보라색 꽃잎이 바람을 따라 휘날렸다. 머리 위로는 태양이 들끓었다. 쨍한 햇살 가닥이 눈에 보일 듯 주변을 밝혔다.
'이건…. 환각? 하지만 이 정도로 생생한 현실감이라니, 보통 주술사는 꿈도 못 꿀 일이야. 기억을 재구성했다기에는 본 적 없는 풍경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으면 거센 바람이 휙 하고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눈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면 저만치서 검은 개 한 마리가 컹컹 짖으며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벌렸다. 개는 빠르게 다가왔다. 덩치가 큰 그레이하운드였다.
"컹!"
개가 앞발들 들고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는 팔을 들어 앞을 막았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자세가 흐트러지고 뒤로 넘어지는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날카롭게 번뜩이던 그레이하운드의 이빨이 떠올렸다. 그 짐승의 엄니가 나를 물어 뜯기 시작한다….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였다. 시간이 지나도 넘어지면서 부딪힌 엉덩이 말고는 아픈 곳이 느껴지지 않았다. 쩝쩝, 넓적한 혀가 핥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컹컹, 개가 다시 짖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그 넓적한 혀로 내 얼굴을 싹싹 핥아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개는 몇 년 만에 재회한 주인을 반기는 양 주변을 맴돌며 핥고 몸을 부딪치고 코로 문질러댔다. 격렬한 환호를 받자니 다소 머쓱한 기분이 되었다. 이 개와는 생전 초면이었던 탓이다. 손을 내밀어 실컷 냄새 맡고 핥도록 두고서 다시 주변을 살펴봤다. 개의 목에는 가죽으로 된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그렇다면 이 개의 주인도 근방에 있다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곧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는데, 나무 뒤에 숨어있던 소년이 빼꼼 고개를 내민 덕이었다. 익숙한 색감의 붉은 머리 소년이었다. 그 아래로는 이런 숲에 어울리지 않는 반듯한 어린이용 정장을 빼입은 채였다. 아이가 나무 뒤에서 소리쳤다.
"Wer sind Sie?"
발음이 독특한데 어느 나라 말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네덜란드? 독일? 나도 따라 소리쳤다.
"미안한데, 혹시 영어 할 줄 아니?"
여전히 독특한 억양으로 아이가 다시 소리쳤다.
"누구세요?"
그리고 이어 말했다.
"여긴 라인헤르츠 가의 사유지에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요."
라인헤르츠. 나는 그제야 소년의 붉은 머리에서 느낀 익숙함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라이브라의 리더이자 나의 상관인 크라우스 역시 라인헤르츠가 아니던가.
아이가 재차 물었다.
"길을 잃은 거예요? 도움이 필요한가요?"
"그래, 여기서 나가야 할 거 같은데, 길 좀 알려주겠니?"
그제야 아이가 나무 뒤에서 나왔다. 그늘에 가려져 있던 눈이 햇살 아래서 반짝였다. 녹음처럼 푸르른 초록색 눈동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따라오세요."
숲속은 꼭 동화 속 삽화와 같았다. 나무 그늘에 가려져 어둡지만, 그 틈새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이 주변을 밝혔다. 나는 손을 뻗어 그 햇살과 나무 그늘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예술 같은 모습에 감탄했다. 바람에 나뭇잎이 휘날리면 그림자는 빠르게 움직였고, 햇빛은 찬란하게 빛났다. 내 몸과 숲의 바닥, 얽히고설킨 나무뿌리 위에서 그림자는 하나가 되어 어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불청객이 아닌 이 숲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앞서 걸어가던 아이가 몇 번씩 나를 되돌아보는 것도 모를 정도로 나는 자연의 풍경에 푹 빠져있었다. 헬사렘즈 로트에서 지낸 3년이 아니더라도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이토록 훼손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도통 접해볼 일이 없었다. 발 아래에서는 풀벌레와 산짐승들의 발소리 머리 위에서는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와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바닥을 보고 감탄 한 번, 다시 하늘을 보고 감탄 한 번. 아이가 나를 불렀다.
"조심해요. 그러다 넘어져요."
아이의 말에 멈춰섰다. 아니나다를까 아래를 보니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있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빼고서 뿌리를 넘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아이는 수줍게 웃으면서 다시 앞장서 걸었다. 그레이하운드가 의젓하게 그 옆을 지켰다.
"그나저나 놀랐어요. 이 녀석이 낯선 사람을 따르는 일은 없거든요. 그렇게 말을 듣지 않고 어디로 뛰어간 일도요."
"그래?"
"네, 공놀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숲으로 들어가더라고요. 따라오니까 당신이 있었어요."
혹시 동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가지셨나요? 애니멀 커뮤니케이셔너처럼? 아이가 물었지만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본디 나는 동물과 친한 편도 아니었다. 그레이하운드가 고개 돌려 나를 보고서 꼬리를 흔들었다.
"글쎄, 나도 놀랐는걸. 동물들은 나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거든."
"그렇군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아이가 대답했다. 동물과 연이 없는 만큼 아이와도 연이 없던 나는 순식간에 어색해진 공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다 생각난 거라고는 크라우스가 형 둘과 누나가 하나인 라인헤르츠 가의 삼남이라는 점뿐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 아버님은 계실까?"
"아버지라면 오늘 저녁에 돌아오실 거예요."
"잘 됐다. 사실 난 라인헤르츠 씨의 동생분이랑 같이 일하고 있거든. 들은 적 있니?"
"자세히는…."
"그럼 나도 자세히 말하기 어렵겠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일하던 중에 마법에 휘말려서 이곳에 떨어져 버렸어."
"마법이요?"
아이의 초록색 눈동자에 호기심이 번졌다. 상기된 표정을 보자니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복슬복슬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줬다.
"응, 마법. 세상에는 참 별일이 다 있지?"
숲은 겉보기만 울창한 게 아니라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 사이는 제법 부드러워져, 공부의 어려움이라던가 새로 키우기 시작한 화분, 요즘 들어 부쩍 털이 하얗게 센 늙은 고양이에 대한 걱정과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아이가 말하면 나는 맞장구치는 정도였지만. 그러는 사이 숲은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했다. 계곡을 지나 산등성이로 내려오자 빽빽하던 나무는 듬성듬성 간격을 두어 떨어져 있고 그만큼 햇살도 더 많이 비쳐 들어왔다. 나무 아래 밑동 근처에는 버섯 대신 풀꽃이 자라났다.
주변을 돌아보고 있으면 옆에서 함께 걷던 아이가 갑작스레 몸을 숙였다.
"뭐하니?"
"얼마 전에 누나한테 배웠어요."
어깨너머로 보면 꽃 한 송이를 꺾어 조물조물하고 있다. 아이가 일어나 다가왔다. 작고 여린 두 손에 그만큼이나 작은 들꽃 한 송이가 들려있었다.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꼭 춤을 신청하는 신사처럼 정중한 태도였다. 웃음을 꾹 참고서 왼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손가락 위에 조물조물 줄기를 엮었다. 곧 꽃반지 하나가 내 손가락에 걸렸다.
"선물이에요."
"와, 이뻐라.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뜻밖의 선물에 미소 지으면 아이는 수줍은 표정을 감추며 다시금 앞서 걸었다.
우리는 또다시 한참을 걸었다. 손가락에 걸린 여린 꽃잎이 상할라 조심하다보니 걸음이 느려진 탓도 있었다. 갈라진 계곡을 돌아, 시냇물을 뛰어넘고 들판을 지나면 드디어 인공적으로 조경된 길이 나왔다.
"저기로 가면 저택이에요."
아이가 손을 뻗어 길 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그레이하운드가 크게 짖으며 앞서 달려 나갔다. 아이도 웃음을 터뜨리며 같이 가자고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나도 그들을 따라 숲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주변이 크게 일렁였다. 공간 재편성이었다.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과 함께 속이 울렁거렸다. 힘을 잃은 다리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면 큼지막한 손이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나?"
크라우스였다. 어느새 숲은 사라지고 그 못지않게 녹음 싱그러운 온실의 화초가 주위를 감쌌다. 라이브라의 사무실로 돌아온 것이다. 주변을 살피다 다시 앞을 보면 크라우스는 여전히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를 한껏 수그렸는지 고개를 들자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바로 마주쳤다. 그의 눈 속에 걱정이 넘실거렸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안경의 존재가 무색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 저는…."
하루에 두 번씩이나 공간 재편성에 휘말린 여파는 강했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지쳐 생각을 길게 잇는 것도 힘들었다. 뭔가 떠오를 거 같은데, 두 눈을 질끈 감아도 결과는 영 시원찮았다. 크라우스는 가만히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네, 괜찮아. 몇 번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더듬더듬 입을 뗄 수 있었다.
"저, 시간 이동 건에 대해 보고도 하고 점심 얘기도 하러 왔는데….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꿈을 꾼 건지…."
"가끔 그런 날이 있지."
말을 잇지 못하고 어물거리고 있으면 크라우스가 작게 웃었다.
"나도 어려서 요정을 만난 적이 있네."
"요정이요?"
"요정이라고 생각했지. 세상에는 별일이 다 있는 법이니까."
아, 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의 위로 아까 만났던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면 크라우스가 허리를 폈다. 삽시간에 달라진 눈높이 때문일까. 무언가 생각나려던 것도 금세 잊혀버렸다. 온실 한 곳에 놓인 괘종시계를 보던 크라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나저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괜찮다면 같이 점심 들지 않겠나?"
"네에…. 그런데 시간 이동 건은 어떡하죠?"
"걱정하지 말게. 그저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거뿐이니까 곧 멈출걸세."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느 지혜로운 노익장이 그리 말하더군."
그리 말하며 크라우스가 온실 문을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같이 나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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